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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부활, 심판의 부활

HSK 2007. 11. 18. 23:58

생명의 부활, 심판의 부활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요 5 : 19 - 29)

서구 교회가 한창 부흥하다가 저렇게 몰락하기 시작한 하나의 큰 계기가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역사적으로 증명할 수 있겠는가하는 의문을 가지고 연구했는데 놀랍게도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성이 없다는 결론이 내려진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있는 사람들의 기록에는 물론 많이 있지만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의 기록에는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부터 서구교회 뿐만 아니라 미국교회들도 주눅이 들기 시작하고 교회가 대부분 텅텅 비어지는 일이 많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부활에 대한 신앙이 식어지면 자연히 시들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교회가 교인들에게 뭔가 위로를 주기 위해서 대표적인 신학자 불트만이 주장한 “부활의 사건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부활의 의미가 중요하다”는 것을 내세웠습니다. 많은 목사님들도 그런 불트만의 영향을 받아 부활에 대한 사건에 확신을 갖기 보다도 그 의미에 대해서 얘기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의미도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았다면 그 뜻이, 그 의미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의미라는 것은, 특히 부활의 의미라는 것은 실제적으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있기에 그 의미가 있는 것이지 만약에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아니하셨다면 우리가 그 의미를 찾는다해도 그것은 헛된 것일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제가 젊었을 때에 이 문제에 부딛히니까 그 다음에는 세상이 캄캄해졌습니다. 참 허무해서 울기도 많이 울었습니다. 그러나 그러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저에게 지혜를 주셔서 깨닫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한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 되어질 수가 없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자연히 예수님의 부활의 사건은 지금 우리가 결과론적으로 볼 때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서만 기록되어질 수밖에 없고 예수를 믿지 않은 사람들에게서는 기록되지 아니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물론 이순신 장군이니 유관순 누나니 하는 이런 것은 자기가 그 사람을 구주로 믿고 안 믿고하는 문제가 아니니까 그저 객관적으로 모두가 쓸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의 사건은 그렇게 쓸 수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다는 것은 무엇이 다릅니까? 예수님이 다시 사신 이 부활의 사건을 실제적으로 역사적인 사건임을 믿을 때에, 이것이 깨달아질 때에, 이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냐 아니냐 하는 것이 구별되어지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인물로 사도바울이 있잖습니까? 그가 사울이었을 때에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고, 물론 부활도 믿지 않았습니다. 스데반 집사를 제일 앞장 서서 돌로 치고 믿는 자들을 핍박하던 그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지 아니했다면 사울은 바울이 되어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만 하면 아무리 강퍅해도, 아무리 자기가 똑똑하다고 잘난 척해도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쓴 책에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사건을 찾는다는 것은 모순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저는 이 문제가 풀리니까 참 자유함이 왔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그리스도인을 통하여 기록되어져 있는 부활의 사건에 대해서 자세히 읽어 보았습니다. 역시 부활의 사건에 대해 많이 기록되어져 있었습니다. 참 감동이 됐습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사실은 성경이 진실로 하나님의 말씀이고, 성경 그 자체가 진리임을 스스로 증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실에 저는 큰 희열을 느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한 사건만큼 정확한 역사적인 사건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정확하고 확실하고 아주 자세히 기록되어진 사건은 이 세상의 어느 역사의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에 “선한 일을 한 사람은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한 사람은 심판의 부활로”라는 말씀이 있으니까 사람들이 또 오해를 합니다. “내가 선행을 하고 착한 일을 해야지 생명의 부활을 얻을 것이다.” 여러분, 의롭게 산다고 떠드는 사람, 사실은 부패가 더 심하고 가식적으로 자기 자신이 의롭다고 위장해서 살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성경 말씀을 통하여 볼줄을 알아야 됩니다. 내가 의롭다하는 것, 그것을 포기해야 됩니다. 그것이 있는 한, 예수님 안에 있는 의를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선한 일이 뭡니까?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보다 선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것이 선한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행위는 나중에 열매로서 되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은 영원한 존재입니다. 예수가 부활하고 그분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됐기 때문에, 우리가 부활한다는 것은 심판의 부활로서 영원한 형벌에 처하는 것에 대해서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부활,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사는 삶을 누리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영생에 대한 것이 깨달아지는 사람은 이세상 살아가는 것은 덤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생명의 부활이 믿어지는 믿음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현재 살아갈 때에도 영생을 얻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과연 부활하셨습니다. 예수의 부활 이상으로 우리에게 역사적인 사실은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에 있는 말씀, 성경에서 그대로 증거하고 있는 말씀이 믿어지는 믿음을 갖는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나에게 있어서 천국의 삶이 있고 그리고 생명의 부활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세상에서 현재 기쁨으로 살 수 있는 삶의 근거를 갖게끔 된 것 입니다. 그 근거는 또한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생명의 역사를 통하여 우리는 은혜안에 산다고 고백합니다. 날마다 의에 죽고 순간마다 은혜에 삽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