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의 목회를 사모하면서
김창근-무학교회 담임목사
목회자의 길을 걸어온 지 20년이 다 되어 가고 있습니다. 신학교를 갓 졸업한 후배들에겐 까마득하게 보일 것이지만, 대선배님들 앞에선 내세울 수도 없는 짧은 기간의 부끄러운 목회의 길입니다. 목회자로서 교회를 섬기고는 있지만 언제나 저의 마음속에는 떠나지 않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목회’ 자체에 대한 것입니다. 숨가쁘게 돌아가는 목회 일정 속에서 가끔 마음속에 “이렇게 하는 것이 목회인가?”하는 질문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 때가 있습니다.
숨이 목에까지 차도록 헉헉대며 목회를 하는 것에 대하여서는 아무런 이의나 불평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지금 제대로 목회를 하고 있는가’하는 질문이 떠오르면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지고 불안에 잠기게 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또는 어디론가 피하고자 하는 유혹이 불쑥 마음을 두드릴 때도 있습니다. 이 때는 바로 쉼이 필요한 때로구나 느껴집니다.
15년 동안 목회하던 제주를 떠나 서울로 목회지를 옮기면서 무엇보다 마음속에 갈급하였던 것은 새로운 목회에 대한 구상이나 계획보다는 쉼에 대한 갈증이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양해 아래에서 캐나다에 가서 온 가족이 2달을 쉬었습니다. 이 기간 중에 제일 많이 한 것은 잠을 자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잠이 쏟아지는지, 거의 매일 평균 12시간을 잤습니다. 온 가족이 잠이 많기도 하였지만 그 동안 쌓였던 목회의 스트레스와 아픔 등을 다 풀어내는 기간이었습니다. 제주를 떠나는 꿈, 눈물을 흘리며 성도들과 헤어지는 꿈, 새로운 교회에 가야 하는 꿈, 설교단에 올라갔는데 원고가 없는 꿈 등 많은 꿈을 꾸며 잠을 잤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자연을 말없이 바라보며 그 동안 느껴 보지 못한 감동도 느끼며 꿈같은 두 달을 지냈습니다. 지금도 자식들은 우리 가족의 최고의 때는 캐나다에서 온 가족이 쉬던 때라고 서슴없이 말합니다.
이제는 좋은 시절을 다 보내고 무섭도록 복잡하고 오염이 된 서울 하늘 아래에서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문득 문득 제주의 아름다운 자연을 생각하고, 캐나다의 웅장한 자연을 그려보면서 목회에 임하고 있습니다. 어쩌다가 내가 여기에 있나 생각하다가도 그런 추억이라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면서 목회자에겐 쉼이 얼마나 절실하게 필요한가를 생각하여 봅니다. 원래 쉼의 창조자는 하나님이 아니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육일 동안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다고 하였습니다(창 2:3). 하나님께서 안식을 주신 이유는 바로 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인식하고 예배하며 자신의 생의 의미를 파악케 하신 것입니다.
안식은 하나님의 명령이었고, 안식을 통하여 하나님과 만나는 신비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유대사회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유대인이 안식일을 지킨 것이 아니고 안식일이 유대인을 지킨 것이다.” 유대인이 하나님의 선민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은 바로 안식에 있었다는 뛰어난 통찰입니다. 이런 각도에서 한국의 목회자들을 보면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크게 어기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지나치게 과중한 목회업무에 눌려서 또는 스스로 목회업무에 얽매이므로 쉼의 신비를 상실하고 목회의 생명력을 잃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쉼의 의미를 생각해 봅니다. 우리 인간은 쉼 없이 일해야 먹고 살 것 같지만, 영물인 우리 인간은 쉼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축제를 경험하며, 쉼 없는 노동의 굴레에서 벗어난 총체적인 삶의 인식이 가능한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우리의 목회란 급변하는 세대에서 자아를 상실하고 하나님을 잊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참된 쉼으로 인도하며, 영원한 쉼이 있는 세상을 동경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쉼과 꿈이 있을 때 인생은 비로소 풍요로워지고 여유가 생겨나고 자유로워지고, 그래야 인간다워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쉼이란 일손을 잠깐 놓는 시간이 아니라 삶의 목적이요, 삶의 기원이요, 삶의 결과일 것입니다. 이제 목회자는 모든 것에서부터 자유로워지는 진정한 쉼의 훈련이 필요하다고 느껴집니다. 화려한 영광, 찬란한 성공, 물질, 쾌락, 집념, 슬픔, 아픔, 분노 등 모든 것에서부터 놓여나서 깊고 참된 쉼으로 들어가야 본질적인 목회가 시작되지 않을 지요? 모세가 민족의 지도자로 부름을 받기 전에 미디안 광야에서 한가로운 40년을 보냈던 것의 의미가 새롭게 와 닿습니다. 모세는 광야 40년 목자 생활 속에서 세상으로부터 떠나는 것이 무엇인지를 철저하게 배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독 속에서 하나님 안에서의 쉼을 배웠고, 다시 세상으로 보내어 질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힘있게 외치고 하나님의 백성들의 회개를 무섭도록 외치어 댔던 광야의 세례요한도 세상으로부터 떠나 쉼 가운데 있었기에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진리와 생명의 참된 길을 예비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참된 쉼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며 그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예수님이 그렇게도 미워하시고 책망하셨던 바리새인과 종교지도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쉼은 목회자에게 절대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쉼은 그저 일손을 놓아 버리는 휴식이 아니라, 목회의 생명과 능력을 공급받는 은총입니다. 가까운 친척이, 스님은 깊은 산중에서 수도를 하고, 신부는 고독의 생활을 하는데 목사는 그렇게 바빠서 언제 침묵의 시간을 갖느냐고 의아하게 묻던 질문이 가끔 생각납니다. 여기에 우리 개신교의 영성이 메마르게 되는 근원적인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하나님과의 새로운 만남으로 향하여 나가는 참되고 깊은 쉼을 우리 목회자들은 목말라 해야 합니다. 그 때에만 새로운 목회를 위한 통찰력과 비전을 얻을 수 있습니다. 진정한 고독과 침묵으로 가는 쉼의 목회를 통하여 우리의 목회가 기름지고 풍요로워진다면 얼마나 우리의 목회는 행복할 것입니까?
여름이 가까웠습니다. 기다리던 휴가의 기회입니다. 이번에는 어떤 여름을 보낼지 조용히 묵상하여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