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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극자료실

다시 시작하고 싶어요

다시 시작하고 싶어요

등장인물: 아버지 , 아들 ,  의사
무대: 어느 병원 수술실 앞 복도,  오른쪽으론 가운데 갈라진 수술실 여닫이문이 있고, 왼쪽으론 하얀색벽 아래 대기자들을 위한 장의자가 하나 높여 있고, 다시 그 왼쪽으론 간이 공중전화 부스가 있다. 벽엔 위생 표어나 액자가 하나쯤 붙어 있어도 좋다.
-어둠 속 앰블란스 사이렌이 급작하게 왔다가 사라진다.  무대 밝아오면, 아들이 뒷모습으로 벽에 머리를 기댄 채 전화를 하고 있다. 상대방으로부터 무슨 말을 듣는지 꽤 오랫동안 미동도 없다.  (사이)  아버지가 손에 아무렇게나 구겨 쥐고 무대 좌측으로부터 급히 뛰어 들어온다. 아버지는 전화를 하고 있는 아들을 보고 무슨 말인가 하려다가 다시 몇 걸음을 걸어 나가 수술실 문을 슬며시 열고 들어가려 한다. 수술실 안쪽으로부터 “안됩니다. 나가서 기다리세요!”라는 말이 들려온다. 아버지는 다시 닫혀진 수술실 문을 멍하니 바라본다. (사이) 몸을 돌려 전화를 하고 있는 아들을 바라본다. 다시 (사이) 아버지는 바바리코트를 장의자 위에 함부로 던진 후 의자 오른쪽에 펄썩 주저 앉는다. 아들은 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오른쪽 어깨를 벽에 기댄 채 (이때부터 옆모습의 얼굴이나마 객석에 드러난다 ) 통화를 계속한다. (사이)

아버지 : 기훈아!  아들, 대답이 없다.

아버지 : 기훈아! (사이) 아들 , 비로서 입을 연다.

아들 : 이제 끊자 (사이) 고맙다 (사이) 아냐 정말 고마워 힘이 되었어 (사이 ) 그래 아들, 몸을 돌려 수화기를 내려놓고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무대 좌측으로 몸을 돌려 나가려 한다.

아버지 : 기훈아!  아들, 발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려 아버지를 바라본다.

아버지 : 어떻게 된 거니?

아들 : 뭐가 어떻게요?

아버지 : 그게 무슨 말이야

아들 : 그럼 경과보고라도 할까요?

아버지 : 기훈아

아들 : 좋아요 말씀드리죠 저의 어머니 그러니까 아버지의 아내시겠군요 그분이 지금 저 수술실 침대 위에 누워 있어요 지금 네시간째예요 이게 다예요

아버지 : 너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거야

아들 : 무슨 말인지 모르시겠어요? (사이) 관두죠 전 지금 아무런 할말이 없어요 말 할 기분도 아니고요 그건 아버지도 아마 마찬가질 걸요

아버지 : 너 왜 그러니?

아들 : 왜냐고요? 정말 몰라서 물으시는 거예요? 아니 그럼 제가 아버지께 물어볼께요 왜 어머니가 지금 저 수술실 안에 누워 있어야하나요?

아버지 : ....

아들 : 대답해 보세요 왜죠? 아버지가 언제 한 번 어머니 챙겨주신 적 있어요? 어디가 아프다 아프다 할 때 병원 한번 데려오신 적 있어요? 어머니가 이 지경이 되도록 도대체 뭐하셨어요! (사이) 그래요 저도 똑같아요 저도 할 말 없어요 절 그냥 내버려두세요.  아들 몸을 돌려 가려 한다.

아버지 : 기훈아! 와! 이리와 앉어!  (사이)

아들 : 좋아요 앉겠어요. 아들, 장의자 왼쪽에 앉는다. (사이)

아버지 : 담배 있니?

아들 : 담배 끊으셨잖아요 그리고 여긴 금연이예요

아버지 : 기훈아 네 심정은 이해해 하지만 어려운 일이 생길수록 우린 더욱 마음을 터놔야해

아들 : 그럼 평소에 좀 터놓으시지 그러셨어요 평소게 막혔던 마임이 지금이라도 터지겠어요? 그건 불가능해요

아버지 : 하지만 지금은 너나 네 어머니 나 모두들 힘들때야

아들 : 문을 따고 들어갔는데 깜깜하더군요 열 시가 넘었는데 거슬 불이 안 켜져 있는 거예요 불을 켜니 거실 바닥에 어머니가 누워있더군요 찬 거실바닥에 말이에요 거기 그렇게 얼마나 누워 계셨을까요 (사이) 얼마나 차갑고 외로우셨을까요

아버지 : (기훈이의 어깨에 손을 얹으려고 하며) 그래 기훈아

아들 : (아버지의 손을 뿌리치며)놔요 이러신다고 뭐가 달라져요! 내 어깨에 팔을 얹어 놓는다고 더 자상한 아버지가 되는 건가요? 그런다고 아내에게 관심 있는 ka편이 된다고 생각하세요!(사이) 천만예요 차라리 평소의 그 모습대로 가만히 계세요 최소한 위선적인 모습으론...아들 말을 잇지 못한다.(사이)

아버지 : 정말 네 아비를 그렇게 생각하니?

아들 : 아버지의 관심은 오로지 일뿐이죠 그저 일! 일! 일이 아버지의 전부죠 아버지에게서 일빼면 뭐가 남죠? 제 졸업식 입학식 같은 데 오시는건 바라지도 않았고, 또 앞으로도 그래요 하지만 아버지에겐 그 일이라는거 말고도 분명히 하셔야 했던게 있어요 일이 아버지의 전부는 될지 몰라도 우리 가족의 전부는 될 수 없어요

아버지 : 아버지한테 있어서 그 일이 뭔지 아니?

아들 : 무슨 말씀을 하려구요? 우리 가족을 먹여 살리고 나 대학도 보내는 돈이라는 말씀을 하시려는 거예요?

아버지 : 그래 돈이나 네가 맞다 돈이다 (사이) 하지만 그 알량한 돈이라는 것은 내 오십 평생을 위태롭게나마 지탱해 준 나의 생명줄이고, 인생이다. 이해하겠니?

아들 : ...

아버지 : 나에게 그 일이라는 것이 없었더라면 나도, 지금의 우리 가족도 없었을 것이다.

아들 : 지금의 우리 가족이라구요? 보세요! 어머닌 수술대 위에 누워 있고, 아들은 어버지에게 대들고 있는 게 지금의 우리 가족이에요 그 일로 만들어놓았는 우리 가족의 모습이 어떤 것이지 보시란 말이예요

아버지 : 맞다 이게 내 인생이었구나...

아들 : 아버지한텐 그 일을 돈으로 바꾸어 오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인지 모르지만 저나 어머니에겐 더욱 중요한 게 있어요! 아시겠어요?

아버지: 그래 그게 뭐니?

아들 : 사랑과 관심이죠

아버지 : 내가 정말 널 사랑하지 않고, 우리 가족에게 무관심하다고 생각하니?

아들 :...

아버지 : 정말 그렇다고 생각하니?

아들 : 그렇진 않겠죠

아버지 : 그럼?

아들 : 사랑과 관심이 아버지 맘 속에 있다고 하더라도, 아버진 그걸 우리에게 주지 못했어요

아버지 : (사이) 맞다...그랬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해야 했겠니?

아들 : 그걸 제게 물으시는 거예요?

아버지 : 너 기억하니?

아버지 : 너 고등학교 때 대학 안가고 음악 한다고 해서 네 기타를 부수고, 집에다 가두고, 너랑 며칠 동안 씨름하면서 아주 호되게 혼낸 적이 있었지.. 처음으로 회초리가 아닌 손으로 너를 때렸었지..기억하지?

아들: ...

아버지 : 그 후로 가끔씩이나마 하던 너와 나만의 등산도 끝이 나고, 어떻게 이런 식으로 지내왔다. (사이) 지금 생각해 봐도, 그때 내가 너에게 그렇게 한 것이 옳은지 그른지 모르겠다. (사이) 하지만 그동안 내내 너에게 뭔가 사과를 구하고, 용서를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진심이다 그리고 작년 연말에도 생각하고 다짐했다. 이렇게 살 순 없다.! 정말 이렇게 살 순 없다! 무엇인가를 바꾸어야 한다.! 새해엔 무엇인가가 변화되어야 한다. (사이) 하지만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아들 : 맞아요 이렇게 되었어요

아버지 : 정말 어떻게 이 지경까지 되었는지 모르겠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남들 사는것만큼만 살아보려고 이렇게 오십 평생을 달려왔다. 아들 하나는, 나보단 좀 더 나은 사람 만들려고 내 딴엔 애를 썼다. 그런데 지금은? 언제부터 이렇게 잔뜩 어긋나고 꼬였을까? 난 정말 다른 아무 짓도 안하고, 우리 가족만을 위한다 생각하고 이 오 십 평생을 쳇바퀴 돌 듯 열심히 일만 해왔는데 지금 이 지경이 되었다. 어디서부터 다시 맞춰 나가야 하는 걸까! 내 인생을 다시 어디서부터 풀어 나가야 하는거지? 이제 내가 뭘 해야 하지? (사이) 내 힘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사이) 수실실 안쪽으로부터 의사가 고개를 내밀고, “김희자씨 보호자분 계십니까?”라고 묻는다. (사이)

무대 서서히 어두워진다.